상영회 Documentary Screening 

《웨스터만: 인간이 관념이라면 그 관념에 바치는 기념비
WESTERMANN: Memorial to the Idea of Man If He Was an Idea》  
감독- 레슬리 부크바인더 (Leslie Buchbinder)


<웨스터만: 인간이 관념이라면 그 관념에 바치는 기념비>는 미국 예술가 H.C. 웨스터만(1922-1981)의 삶과 작품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시카고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레슬리 부크바인더 감독의 작품으로 원래는 3D로 제작됐다. 웨스터만의 작품에 입체성을 부여함으로써 관객이 웨스터만의 세계에 몰입해 작품과 직접 마주하는 내밀한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서였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여건상 2D 상영에 그치게 되었지만, 웨스터만 작업의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웨스터만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따라가며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이 묵직한 주제를 다루기 위해 다큐멘터리는 필연적으로 웨스터만의 인생 여정을 좇아야 했다. 웨스터만 자신이 진정한 예술은 한 인간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관점에서 작가의 내면은 작품을 탄생시키는 토양이며, 작품은 다시 작가가 외부 세계에 반응하고 영적 차원과 교류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체 역할을 해준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삶을 다루지 않고 그의 작업에 관해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웨스터만은 예술 작품과 친구들을 위해 손수 만든 선물을 구분하여 다루지 않았다. 작품과 선물 모두 동일하게 그의 영혼에서 비롯된 사물인 까닭이다. 웨스터만의 세계에서는 삶과 예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기에 작업 역시 일상 사물의 실용성과 예술 작품의 무용성 사이에 걸쳐 존재한다.

192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웨스터만은 미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고스란히 통과했다. 그의 작품은 사회적 사건과 개인의 경험이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하여 직조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웨스터만은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해 전쟁의 참상을 몸소 체험했을 뿐 아니라,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냉전과 베트남 전쟁, 소비자본주의 또한 목격했다. 특히 전쟁 트라우마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그를 평생 동안 괴롭혔다.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죽음의 배', '상어 지느러미', '전사한 군인들에게 바치는 각종 기념비' 등의 모티프는 그의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괴로움이 웨스터만 작업의 전부는 아니다. 1950년대 중후반, 시카고 예술 대학에 복학한 웨스터만은 이곳에서 아내 조애나 빌을 만나 세상의 나머지 절반을 발견하게 된다. 전쟁이 그에게 슬픔과 죄책감, 죽음을 가르쳐줬다면, 사랑은 삶의 아름다움과 희망을 보여준 셈이다. 이후 웨스터만은 (그의 1963년 작품 제목대로) '큰 변화'를 겪게 되고, 세상의 어두운 측면과 기묘하게 뒤얽힌 낙관주의를 기조로 하여 작업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역설적인 유머와 말장난을 통해 부조리의 감정을 다루는 동시에, 금방 소비되고 사라지는 것들이 판치는 미국 현대 사회에 오래 지속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부각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이는 웨스터만이 목공에 유달리 애정을 쏟았다는 사실과도 밀접히 연결돼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꾸준히 목공 일에 관심을 가졌고, 무명 시절에도 목공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작가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목조각을 가장 중요한 매체로 다루었다. 웨스터만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1960-70년대에 미국은 소비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고, 복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예술가가 몸소 제작한 원본의 무게가 철저히 부정되던 시기였다. 웨스터만은 소비주의에 대한 반감을 빈번하게 드러냈으며, 기계 생산에 맞서 자기 손으로 직접 나무를 깎아 조각을 만들었다. 당시 미술계 흐름은 개의치 않고 재료의 물성과 육체적으로 부딪히며 장인 정신과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어쩌면 이번 다큐멘터리는 디지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의미한 생각거리를 던져줄지도 모른다.